“차도 없던 나라가 고속도로가 먼저”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만 놓고 보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초대형 사업이었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약 142달러 수준이었고, 수출액은 약 3억 2천만 달러에 그쳤으며, 실업률 6.2%, 물가상승률 12%라는 숫자가 말해주듯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했던 시기였다.
고속도로라는 개념 자체도 낯설었다. 한국은 철도 중심 국가였고, IC와 톨게이트, 폐쇄식 영업체계 같은 현대적 고속도로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자동차가 많지 않은 나라에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를 짓겠다는 구상은 전문가와 정치권, 언론 모두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이미 철도와 국도가 있는데 막대한 돈을 들여 새 도로를 만들어야 하느냐는 의문도 이어졌다.
돈도 기술도 부족했던 시대의 국가적 도박

경부고속도로가 ‘미친 프로젝트’로 불린 이유는 반대 여론만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사비 추산은 정부 부처별로도 크게 달랐고, 실제 건설비는 약 429억 원에 달했다.
당시 한국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국가적 도박에 가까운 부담이었다. 개발도상국은 식량과 농업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국제적 시각도 있었고, 가뭄과 지역 균형 문제까지 겹치며 서울과 부산을 먼저 연결하는 계획에 비판이 따랐다.
기술과 장비, 경험도 충분하지 않았다. 산을 깎고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어야 했으며, 특히 옥천 인근 당재터널 구간은 낙반 사고가 발생한 대표적 난공사 구간으로 남았다.
경부고속도로는 단순히 돈으로 밀어붙인 사업이 아니라, 당시 한국이 갖고 있던 모든 한계를 정면으로 넘어서야 했던 공사였다.
2년 5개월 만에 완성된 국토의 대동맥

현대건설을 필두로 1968년에 착공된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전 구간이 개통됐다. 약 400km가 넘는 길이를 불과 2년 5개월 만에 완성했다는 점은 당시 기준으로도 놀라운 속도였다.
하지만 빠른 완공 뒤에는 무거운 희생도 있었다. 공사 과정에서 77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충북 옥천 금강휴게소 인근에는 이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남아 있다.
개통 이후 변화는 빠르게 나타났다. 서울과 대전, 대구, 부산이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물류 속도는 빨라졌으며 고속버스 시대도 열렸다.
산업 도시들이 성장하는 기반이 마련됐고, 지역 간 이동 시간이 줄어들며 대한민국은 반나절 생활권으로 들어서는 출발점을 맞았다.
불가능하다는 말 위에 세워진 산업화의 상징

경부고속도로는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으로 남았다. 차도 별로 없던 시절, 고속도로 개념조차 생소했던 나라가 먼저 길을 놓았고, 그 길 위로 물류와 사람, 산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중 유일하게 1번이라는 번호를 유지하는 상징성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 당시에는 필요성조차 의심받았지만, 완공 후에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국가 성장의 축이 됐고, ‘한강의 기적’을 관통한 국토의 대동맥으로 불리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거대한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시기에 미래를 먼저 보고, 위험과 반대를 감수하며 길을 냈다는 점이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억 속에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